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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터널>을 봤습니다. 무너진 터널에 갇힌 생존자의 고군분투로 정리되는 단편적으로 보이는 영화 줄거리지만, 김성훈 감독은 군데군데 재밌는 장치들을 넣어 무료하지 않을 장치들을 넣었습니다. 그 중 인상적인 장치는 라디오 방송입니다. 애석하게도 딱 하나의 라디오만 수신이 되었는데, 하정우가 자주 들었던 방송은 바로 '정오의 클래식'이었습니다. '정오의 클래식' 역시 생존자가 유일하게 듣고 있는 방송임을 알면서 그를 위한 선곡과 응원의 메시지를 편성하며 불완전한 쌍방향 소통을 이어나갑니다. 어둡고 침울하고 정적인 무너진 터널을 배경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이었기 때문일까 역설적으로 그 아름다운 선율이 더 아름답게 들립니다. 하정우도 그 음악에서 삶에 대한 의지를 느끼고, 힘은 얻곤 합니다. 


이런 극한 생존 상황에서의 클래식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2002년에 개봉된 <피아니스트>가 가장 대표적입니다. 실화를 다룬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중에서도 재연과 역사 고증에 철저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바르샤바에서 잘 나가는 피아니스트가 2차 세계대전에서 홀로코스트를 피해 생존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나치가 행한 극악무도한 행위들이 잘 녹아있으며, 거기서 느낀 피해자들의 처절함과 냉혹함이 가감 없이 드러난 작품입니다. 주인공 슈필만이 가족과 생이별하고 이웃들이 죽어나가며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절망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 속에서 울려퍼지는 피아노 선율은 아이러니하게 그 이전에 들었던 어떤 클래식 곡보다 아름답게 들립니다. 이런 예술적 여운은 영화가 끝나서도 이어집니다. 생존과 클래식이란 조화 덕분에 아카데미에서 3개 부문 수상을 할 수 있었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영화로 남았습니다. 작년에 국내에 다시 재개봉하며 많은 팬들이 다시 영화관을 찾기도 했습니다.


생존을 다루는 콘텐츠는 게임에서도 있습니다. 핵전쟁 후 세기말 배경으로 볼트라는 지하 벙커에서 생존한 주인공으로 플레이하는 '폴아웃' 시리즈도 그 중 하나입니다. 플레이어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미국을 배경으로 좀비처럼 변한 이들과, 변종 생물들의 위협을 극복하며 이야기를 진행시켜야 합니다. 불모지에서의 뒤에서 공격하는 괴생물체와 사방에서 들리는 정체 모를 괴기한 소리는 이 게임을 공포 게임의 반열에 올리기도 합니다. 이런 수준 높은 공포 속에서 나름 게임 제작사는 게이머에게 배푼 배려가 있습니다. 바로 라디오 시스템입니다. 라디오 방송을 틀어 놓으면 DJ의 수다나 음악으로 게임 속에 가득찬 미스테리함과 공포를 덜어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작년에 출시된 '폴아웃4'에서는 클래식 라디오가 추가되었습니다. 바하부터 리스트, 쇼팽까지 유명한 클래식 곡이 수록되어 게이머의 긴장 완화에 큰 힘을 보탭니다. 게임은 머리가 터지고, 사지가 분리되는 정도의 잔인함이 담겨있음에도 낭만적이고 잔잔한 클래식이 여기서도 아이러니한 매력을 뽑냅니다. 쇼팽의 곡이 적의 머리 터지는 와중에서도 더럽게 아름답습니다.


재밌게도 위에 소개한 두 콘텐츠에는 같은 음악이 삽입되었습니다. 폴아웃4의 클래식 라디오와 그리고 영화 <피아니스트>의 가장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군 장교 앞에서의 연주씬에서 나오는 곡이기도 하죠. 쇼팽 발라드 1번입니다. 쇼팽의 발라드 1번의 시작은 절망과 좌절로 시작됩니다. 무겁게 운을 띄우며 불안함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멜로디는 슬픔과 침울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곡은 이렇게 내리막을 그리지 않습니다. 곡은 후반부에 클라이막스를 터트립니다. 그때 발라드 1번은 극복과 활기찬 박차오름을 노래합니다. 마치 하정우가 터널 속 죽음의 극복을 이겨낸 것처럼, 슈필만이 홀로코스트와 굶주림과 추위로부터 견뎌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삶도 크게 보면 '생존'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을까요. 밥벌이를 위한 생존, 천재지변으로부터의 생존, 격한 감정적 요동으로부터의 생존. 사실 쇼팽의 발라드 1번이 채택한 위기, 고조, 극복이란 사이클은 식상합니다. 고진감래, 비온 뒤에 땅 굳는다, 이런 말 많듯이요. 그러나 어쩔 겁니까? 우리 삶이 힘들다면 고전스타일대로 극복하는 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 아닙니까. 삶이 고달프고 버거울 땐 발라드 1번을 들어봅시다. 터널의 끝엔 빛이 있고, 고진감래 같은 고전적 교훈이 가장 최고니까요. Classic is the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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