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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전날에는 안필드 투어를 돌았습니다

얼마 전 슈퍼리그 출범과 몰락이 삼일천하처럼 전 세계 축구계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일견 축구 팬들이 한 번쯤은 생각해온 인기구단만의 리그, 그러니까 풋볼매니저에서 스왑리그로 구성한 것처럼 즐거운 볼거리가 탄생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메시의 '프리미어리그 검증설'이 성사를 앞두고 격한 축구 팬들의 반대에 부딪혀 사라졌습니다.

 

리그 내 비인기 팀으로 분류된 격이 되어버린 비슈퍼리그 참가팀들의 반대, 기존 축구대회 관계자와 전직 축구계 인사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슈퍼리그 출범 반대의 중심은 다름 아닌 슈퍼리그에 참가하기로 발표했던 팀들의 현지 로컬 팬들이었습니다. 팬들은 홈구장에 나와 강력한 문구가 적힌 걸개를 펜스에 매달고, 다시는 팀을 응원하지 않을 것처럼 극렬하게 반대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렇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팬들의 반대를 생생히 목격하자마자 프리미어리그 팀들은 빠르게 탈퇴를 결정했고, 이를 시작으로 슈퍼리그 출범은 전복됐습니다. 이렇게 다시 유럽 축구는 정상 궤도로 돌아갔습니다.

 

왜 이렇게 로컬 팬들의 목소리가 강하게 반영됐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직관 경험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축구팬들이라면 직관을 빼놓지 않고 하고 왔겠지만, 저는 조금은 특별한 경험, 남들에게 들어보지 못한 체험을 했다고 생각이 들어서 적어서 기록해봅니다.

 

제가 관람한 경기는 19-20년 리그 리버풀과 토트넘의 경기였고, 리버풀 홈 안필드에서였습니다. 3월 31일, 리그 막바지에서 맨시티와 우승 경쟁을 뜨겁게 벌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당시 영국을 출장할 기회로 런던을 방문했습니다. 주말을 이용해 리버풀에 여행 겸 축구 직관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운이 좋게도, 딱 손흥민 선수가 한참 잘 나가고 있는 토트넘과의 경기가 주말에 있어서 리버풀에 다녀오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티켓 구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직관을 어렵게 하지 않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건 순진한 착각이었죠. 직접 경험해보셨을 분들은 아시겠지만, 여행객으로서 인기팀의 경기 티켓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그나마 현실적인 건 티케팅 대행 사이트에서 프리미엄을 붙여 비교적 큰돈을 들여 보는 것, 혹은 경기일이 임박해서 경기장 앞에서 암표를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전자는 직관에 꽤 많은 돈을 들여야하면서 그리 좋지 않은 사이드자리에서 봐야 한다는 단점, 후자는 경기 당일까지 표를 못 구하거나, 사기를 당할 리스크가 있었죠.

 

먼저 대학 다닐 때 리버풀에서 온 강사와 친해졌던 일을 얘기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 친구는 리버풀에서 왔고, 축구를 좋아하고, 제라드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3년 후배였습니다. 다른 과 수업인데도 저는 굳이 수강신청을 해서 그 강사 수업을 듣고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몇 년 전 한국에서의 커리어를 마치고 러시아로 떠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영국을 가는 김에 그 친구에게 리버풀 경기 티켓을 구할 로컬만의 좋은 방법이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그 친구는 흔쾌이 알아봐주겠다곤 했지만, 경기 3일 전까지 희망스러운 응답이 없어 저도 약간은 기대를 내려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기가 있던 주의 목요일쯤, 연락이 왔습니다. "표를 구했니?", "아니..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어려울 거 같아"

그 친구는 놀라운 제안을 해줬습니다. 아버지가 시즌권을 보유했는데, 괜찮으면 아버지 대신 경기 보러 가지 않겠냐는 겁니다. 아버지가 시즌권을 갖고 있다면 골수 팬일 텐데, 큰 게임을 양보받게 되니 약간은 미안하고 송구스러웠지만...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냉큼 가겠다고 답했습니다.

 

당장 기차표를 예매하고 주말을 기다렸습니다. 주말이 되어 리버풀 라임스트리트역에 달려갔고, 강사 친구가 부탁해서, 그의 사촌이 저를 맞아주러 나왔습니다. 친구네 고모 가족인데, 그 가족이 모두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줬습니다. 왜냐면 그 가족 중 엄마와 아들이 시즌권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골수 리버풀 팬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고로 시즌권은 좌석에 따라 685~865파운드(100~140만원)라고 합니다. 

 

하루를 친구의 아버지집에서 신세를 지고, 그 아버님은 저를 리버풀 시내로 내려주고 작별인사를 나눴습니다. 시즌권을 깜빡하지 말고 조카에게 넘겨주고 오라는 신신당부까지 말이죠. 경기 시작 전 앤드류네 가족과 시내에서 스페인 음식을 먹고 안필드로 떠나야 했습니다.

 

여기서 현지인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이동수단 문화(?)가 있었습니다. 저도 당시엔 처음 봤습니다. 바로 경기 당일에 시내와 경기장을 오가는 사설 택시였습니다. 왜 사설이란 표현을 하냐면 그냥 일반 승합차들이라서 그렇습니다. 참고로 앤필드는 다운타운과 차로 5~10분 거리입니다. 걸어가긴 부담스러운 거리죠. 그래서 경기가 있는 날에는 이런 운송수단이 돈벌이로 출동합니다. 이런 차들이 있는 공간으로 가면, 경기장으로 향하는 차들이 꽤 많이 늘어서 있습니다. 운전자에게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인당 현금 5파운드를 줍니다. 9인 정도 타는 승합차가 가득 차면 경기장을 향해 출발합니다.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경기를 보러가는 낯선 이들끼리 축구 얘기 혹은 설전이 오갑니다. 

 

5파운드면 우버를 타는 것보다 확실히 저렴하기 때문에, 그리고 타운타운에서 편하고 빠르게 이용할 수 있어서 경기가 열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 같았습니다.

 

경기 시작 전 시간이 좀 남았다고, 가족들은 경기장 안에 가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경기장 바로 앞 펍으로 향합니다. 딱 우리가 생각하는 축구 좋아하는 영국 아재들이 가는 그런 펍이었습니다. 거긴 이미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이 많았고, 자리가 모자라 서서 맥주를 기울이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맥주 한 병씩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면 뱃지나 머플러 등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이 왔다갔다 합니다. 뱃지가 생각보다 잘 만들어져서 한참을 구경했습니다.

 

안필드 바로 건너편에 있는 펍 입구입니다. 낡은 건물이 펍이고 안팎이 경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맥주를 1~2병 마시고 기분을 낸 후에야 경기장에 들어갑니다. 안에 있는 매점에서 커피나 맥주를 하나씩 더 손에 들고, 잠시 수다를 떱니다. 천장에 걸린 TV에는 다른 경기장에서 진행 중인 프리미어 경기 중계가 보입니다. 선수들이 마무리 운동이 끝나갈 무렵에 가족들과 좌석으로 향합니다.

 

스탠드로 나가기 전에 있는 매점과 휴식공간. 축구 경기를 보기 전에 다른 축구 경기를 보는 사람들.

 

제가 앉은 곳은 메인스탠드의 건너편, 서 케니 달글리시 스탠드에 있는 1층 좌석, 그러니까 아래 그림에서 KK에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야말로 축구 직관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자리였습니다. 사실 시즌권 자리라고 해서 이렇게 중앙이며 이렇게나 가깝게 선수들을 볼 수 있는 자리인지 몰랐습니다.

 

KK라고 표시된 구역, 센터라인 바로 앞 경기 관람하기 최상급인 자리에 앉았습니다.

바로 눈앞에서 몸 푸는 선수들에게 눈이 팔려 정신이 나간 가운데, 재밌는 건 주변에 있는 시즌권 홀더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은 선수들을 맨눈으로 보는 것도 새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게 당연한 게 2주에 한번은 이렇게 코앞에서 선수들을 본다는 건데, 선수들이 신기하기보단 익숙한 존재인 게 당연했습니다. 주변 시즌권 홀더들은 시선이 전혀 경기장으로 향하지 않았고 대신 옆자리, 앞이나 뒷자리 이웃들과 인사하고 근황 토크를 나눴습니다. 원래 제가 앉은 자리엔 매번 보던 사람 대신 낯선 동양인 청년이 있으니, 다들 '저놈은 누겨?'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뒤에 앉은 사촌에게 "너네 삼촌은 어디갔어?"라고 물어봤고, 사촌에게 자초지경을 설명듣고 나서 제게도 환하게 웃어줬습니다. 멀리서 한 아저씨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산 옥스포드 털모자를 쓴 걸 보고 반가워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경기가 시작하기까지 저는 도란도란 인사를 나누고 소개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실 저는 준비 운동하는 선수들 하나하나 뜯어보고 사진도 찍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요. 현지 팬들은 직관하러와서 경기 시작 전까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너무 가까이에서 보니까 비현실적인 선수들

 

경기가 시작되니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할 정도로 경기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한가지 더 신기한 점은, 시즌권 홀더들은 응원가나 경기에 열정적으로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심지어 경기 시작 전 흘러나오는 You'll Never Walk Alone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아니 왜 이 노래를 다 떼창하지 않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큰둥해보였습니다. 제가 평소 생각해온 홈팬이라면 목청이 떨어질 것처럼 응원가를 함께 부르고, 열심히 소리도 지르고 그럴 줄 알았거든요. 시즌권 홀더들은 생각보다 꽤 얌전하게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물론 맘에 안 드는 플레이, 이상한 심판 판정, 결정적인 골 찬스에서는 제가 생각한 그런 반응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오디오로 듣는 응원가나 열정적인 사이드석, 흔히 말하는 Kop 좌석에 있는 홈팬들이었습니다. 경기 내내 여기서 나오는 리액션과 소리가 가장 거대했습니다.

 

가장 기대감과 긴장감이 고조되는 You'll Never Walk Alone... 주변에서 따라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리버풀이 경기 종료 직전 골을 뽑아냈고, 극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경기가 종료되고 주변 로컬들은 짧게 기뻐하고, 경기장에 오래 남아있는 대신 서둘러 경기장 밖으로 나갔습니다. 다들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타고 왔던 사설 택시들을 타러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택시 안에서 10대로 보이는 토트넘 팬이 앞자리에 탔고, 어쩌다보니 고모랑 축구로 토론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굉장히 진지하게 서로의 팀을 평가하고 뭐가 좋았느니, 뭐가 문제인지 한참을 얘기했습니다.

 

 

다운타운에 도착했고, 저는 바로 런던으로 돌아가기 위해 라임스트리트역으로 향했습니다. 같이 축구를 보러온 고모와 사촌이 역까지 마중을 나왔습니다. 역 안에서 울상이던 토트넘 원정 팬에게 사진 찍어달라고 요청해 기념 사진을 찍고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안필드 직관과 엄청난 환대를 해준 가족 덕분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승리팀의 퇴근길. 익숙한 영국의 주택 골목을 가로질러 택시를 타러 갑니다.

 

이 시즌권 홀더들은 1년에 한 번씩 적지 않은 금액을 클럽에 지불합니다. 그리고 홈 경기마다 빠짐없이 자리를 매워 홈팀에 힘을 더해줍니다. 이는 팀에게 재정적으로나 분위기에 있어서나 대들보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큰 힘을 주는 주체는 바로 로컬 팬이었습니다. 경기장 울타리를 넘어서 지역경제 전반이 이 팬들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경기 시작 전 뱃지를 파는 잡상인, 축구장 안팎의 펍, 관중들을 실어나르는 택시사업자 모두 로컬 팬들에게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슈퍼클럽에 참가하면서 지역을 등지고 바깥을 향하려는 구단에게 쏟아지는 로컬 팬들의 비판과 원망의 외연은 좁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비판과 회의는 클럽은 물론 지역사회의 위기를 의미했습니다. 다행히도 구단은 이런 위기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로컬 팬들에게 바깥에서의 경쟁은 챔피언스리그, 유로파컵 같은 대륙간 대회로 충분했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깨달았습니다. 슈퍼클럽 파동을 겪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연고지를 떠난 클럽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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