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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바다로 간 기자

Mr Brightside 2017. 2. 24. 13:52



 하루에 슬픈 일 기쁜 일 소식을 다양하게 들었던 어제 유난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제가 한 언론사 실무평가를 준비하면서 만난 분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저보다 2살 연상이었고, 그 언론사를 지원했을 때 당시 여의도에 있는 한 경제지 기자였습니다. 그분이 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그곳에서 기자의 역할보다 영업과 수익 창출을 위해 주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회의감이 들었고, 저널리스트의 역할을 실현할 수 있는 곳으로 이직하기 위해 다양한 언론사 공채에 도전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실무면접 전날 급하게 결성된 스터디에서 처음 봤습니다. 지금 한 언론사에 적을 두고도 왜 새로운 언론사로 지원을 하는지부터 앞으로 무엇을 꿈꾸는지까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운 좋게 둘 다 면접을 합격하고 다음 전형으로 5일간의 실무평가를 같이 할 수 있었습니다. 실무평가 기간은 총 6명의 생존자(?) 중에서 최종합격으로 1~2명만이 살아남는 치열한 1주였습니다. 스터디에서 먼저 만나 한 번 더 봤다는 이유로 다른 지원자들보다 그분에게 조금 더 의지하며 속에 있는 말도 편하게 하면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경쟁하는 상황에서, 게다가 그분은 다니던 곳에 1년치 휴가를 써서 실무평가를 보러 온 더 절박한 상황에서 경쟁심을 보여주기보다 동질감과 어른스러운 모습만 엿보였습니다.
그곳에서 처음엔 막막했던 1주일이 쏜살 같이 지났습니다. 5일간 일해보고 하면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고 그만큼 기대감도 생겼습니다. 최종면접을 보고나서도 내가 붙을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경쟁자가 합격한다면 질투나고 불만이 있을 거라는 느낌도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저대신 합격한다면 저는 그리 크게 아쉬워할 거 같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열정과 실력,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품성이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 언론사가 그분을 합격시킨다는 사실은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그분은 지난 해 그 언론사 공채에서 최종 면접까지 갔던 이력도 있었고, 게다가 기존 다니던 회사에 5일짜리 휴가를 내고 실무면접을 온 집요함까지 더해져 정말 강력한 경쟁자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분이 된다면, 그 언론사는 성공적인 공채를 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다 저와 그분은 둘 다 낙방했습니다. 서로 아쉬움이 컸고, 그리고 그분은 다시 쓸쓸하게 달갑지 않은 원래 직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후 간간히 연락하며 지냈습니다. 그분은 어쨌든 배울 점 많고 제게 도움이 되는 좋은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여섯 달 뒤에 오랜만에 같이 실무평가를 본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분이 돌연 아리송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 배타러 가려고요. OO씨도 배나 같이 탈래요?" 자초지경을 들어보니 얼마 전에 일반인 대상으로 선박을 운용하는 자격을 주는 기회가 새로 신설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고등교육을 통해 전문적으로 배우거나 대학을 관련 기술로 전공한 특정 사람에게만 배타는 일이 허용됐는데, 이번에 일반인이 도전할 수 있는 길이 생겼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때는 흔한 직장인의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일에 찌든 직장인이 흔히들 "나 일 때려칠라고"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게 웃어 넘기고, 농담으로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형이 길 닦아 놓으시면 제가 따라갈게요!"

그 이후로 물어볼 것이 있을 때만 연락하기만 했지만 형의 행방과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배를 탄다는 말은 이미 한 귀로 흘려 세상 시끄러운 소리에 가려 기억조차 나지 않았고, 그저 원래 일하던 언론사에서 일하겠거니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내 앞길을 준비하는데 분주하기도 했고요.
오늘 한 기자 친구와 맥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던 중 그 여의도에 있는 경제지가 공채가 열렸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고, 제가 거기서 일하는 그분이 생각나 그분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스갯소리로 배 탈 거라는 이야기를 한 것도 불현듯 생각나서 심심풀이 땅콩인냥 사소한 담소처럼 풀었습니다. 근데 신기하게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어? 얼마 전에 배타러 간다는 기자 찌라시가 있었는데. 이름도 떴었어."
그 친구가 핸드폰을 뒤져 찾아낸 두 찌라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파이낸셜뉴스 평기자 2명이 오늘부로 사표 제출
이유는 배를 타러 간다고.. 해양간부교육프로그램에 들어가 18개월 교육 이수 후, 뱃사람으로 전향 예정

2. 친구가 회사를 떠난다. 기자를 그만둔다.
연말이었다. 우리는 새해 다짐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는 배를 탈거라고 말했다. 그 전부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눴던 얘기였다.
배를 타면 외롭지 않겠냐고 물었다. 외롭지 않을거라 말했다. 기자 생활이 재미없었냐고 물었다. 그저 웃는다. 대안은 언제나 실망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우리는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결론은 분명했다. 분명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다. 나는 축하했고, 부러웠다.
나는 친구덕에 이 회사에서 일한다. 친구는 우리 회사에 원서를 내라고 권했다. 나는 면접장에서 "왜 우리회사를 지원했냐"는 질문에 "친구가 다녀서 썼다"고 말했다. 선배들은 웃었다. 그덕에 붙었다,고 생각한다.
오늘 찌라시가 돌았다. '평기자 2명이 오늘부로 사표 제출. 이유는 배를 타러 간다고'. 친구말고 그의 동기인 선배도 같이 떠난다. 나도 오늘 알았다. 기자들은 난리났다. 나에게 사실이 맞냐고 물었다. 한 기자는 "존경한다고 전해주세요"라고 말했다. 다른 자는, 어떤 권력에 찌든 자는 이를 보고 비웃었다. 기자를 하다가 뱃사람이 되는 게 말이되냐며 말이다.
얼마전 타사 기자들과 술을 마셨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10년 후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지 대화를 나눴다. 누군가는 시트콤을 쓰고 싶다고, 다른 누군가는 그럼에도 기자 생활을 놓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정책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고 싶다고 했고, 어떤 이는 어찌됐건 사회학과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시시껄렁한 우리들도 계속 고민하는 주제다.
새출발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허비한 기회비용은 우리를 걷지 못하게 만든다. 선례가 없다면 더욱 그렇다. 친구는 이제 새출발을 한다. 뭐가 됐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될거라 믿는다. 이미 실행할 수 있는 용기가 이를 증명한다. 수고했다.

그분이 정말 배를 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언도 아닌 일개 찌라시로 접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연예인의 하찮은 치정 소식, 언론계의 짜잘한 소식들, 언론에 감춰진 사실을 폭로하는 내용들을 접했던 그 찌라시 말입니다. 그러나 이 찌라시가 뻥을 담은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배 타러 갈 거라는 말을 해주던 그분의 표정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단순히 농으로 던지며 지었던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그 표정은 순수한 열정을 갖고 기나긴 고민을 거친 후에만 보여줄 수 있었던 표정이었습니다.

존경스러웠습니다. 앞에 앉아있던 그 친구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돈 괜찮게 주는 어엿한 언론사 기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까지 바다 위에서 고요한 외로움을 겪어야 하는 뱃사람이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니까요. 돈의 논리를 따른 것도 아니고, 야망의 욕심도 아닌 단지 마음 가는 길을 묵묵히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시쳇말로, 정말 미친 짓이었습니다.

그분은 바다로 나가 훌륭한 저널리즘을 실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큰 돈을 만지면서 물질적 만족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좁디좁은 배 위에서 외로움을 느낄 것입니다. 기자로써 양복 잘 갖춰입은 대기업 홍보팀이 굽신거리는 일도 앞으로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꿈을 소신있게 선택한 점, 마음이 부르는 곳으로 가기로 결단을 내린 점, 새로운 분야로의 무모한 개척을 했다는 점. 이것들은 앞에 나열한 것들보다 더 위대합니다. 그분의 판단을 존경하며, 그분의 선택을 응원합니다. 바다에서 인생의 빛을 찾길 기원합니다.

"배는 항구에 있을때 가장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이유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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